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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슈카 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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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슈카 피셔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녹색당 소속으로 독일 연방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85년부터 1987년, 1991년부터 1994년까지 헤센 주 환경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1998년부터 2005년까지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코소보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독일의 개입을 지지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학술 및 컨설팅 활동을 하며, 현재는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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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슈카 피셔
기본 정보
2014년의 피셔
이름요제프 마틴 피셔
원어명Joseph Martin Fischer
출생일1948년 4월 12일
출생지게라브론, 뷔르템베르크-바덴, 연합군 점령하 독일
국적독일
정당동맹 90/녹색당
배우자결혼: 에델트라우트 자이페르트 (1967년–1984년, 이혼)
결혼: 잉게 포이스켄스 (1984년–1987년, 이혼)
결혼: 클라우디아 봄 (1987년–1998년, 이혼)
결혼: 니콜라 레스케 (1999년–2003년, 이혼)
결혼: 미누 바라티 (2005년~)
자녀2명
대통령로만 헤어초크
요하네스 라우
호르스트 쾰러
관직
독일 부총리재임 시작: 1998년 10월 27일
재임 종료: 2005년 11월 22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이전: 클라우스 킹켈
다음: 프란츠 뮌테페링
독일 연방 외무부 장관재임 시작: 1998년 10월 27일
재임 종료: 2005년 11월 22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이전: 클라우스 킹켈
다음: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연방 하원 의원 (헤센 선거구)재임 시작: 1994년 10월 16일
재임 종료: 2006년 9월 1일
선거구: 동맹 90/녹색당 목록
헤센 주 부총리재임 시작: 1991년 4월 5일
재임 종료: 1994년 10월 5일
주총리: 한스 아이헬
이전: 볼프강 게르하르트
다음: 루페르트 폰 플로트니츠
헤센 주 환경에너지부 장관재임 시작: 1985년 12월 12일
재임 종료: 1987년 2월 9일
주총리: 홀거 뵈르너
이전: 신설 직위
다음: 아르민 클라우스 (대행)
헤센 주 연방 업무부 장관재임 시작: 1991년 4월 5일
재임 종료: 1994년 10월 5일
주총리: 한스 아이헬
이전: 볼프강 게르하르트 (연방 업무 대리)
다음: 루페르트 폰 플로트니츠

2. 어린 시절과 좌익 활동

요슈카 피셔는 어린 시절부터 좌익 정치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1967년 독일 학생 운동에 참여했고, 1968년부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혁명 투쟁"이라는 과격 단체의 일원이 되었다.

1975년까지 "혁명 투쟁" 소속으로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하며 화염병을 사용하기도 했다. 2001년 공개된 사진에는 피셔가 경찰에 맞서는 모습이 담겨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사과했다.[5] 1969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회의 참석차 알제를 방문했다.[6]

1976년 3월, 울리케 마인호프 사망 항의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 2명이 화염병에 중상을 입은 사건과 관련해 체포되었으나 이틀 후 석방되었다.[5] 1977년 독일의 가을이라 불리는 좌익 과격파 테러 사건이 빈발했지만, 피셔는 과격파 활동에 회의를 느껴 활동을 중단했다.[7][8]

1981년 헤센 주 경제장관 피살 사건에 사용된 무기가 1973년 미군 기지에서 도난되었고, 피셔 소유 차량으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피셔는 지인에게 차를 양도했고, 나중에 무기 운반에 사용된 것을 알았다고 해명했다.

2. 1. 어린 시절

Joschka Fischerde바덴뷔르템베르크주 게라브론에서 정육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헝가리에 배경을 두었다. 1946년 소비에트 연방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추방된 독일인들 중에 그의 가족도 있었다. 별칭인 요슈카는 요제프의 헝가리식 애칭 Jóskahu에 기원을 둔 것이다. 어린 시절 외핑겐의 본당에서 시종으로 봉사했다.[2] 1965년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사진작가 수업을 받았으나 이듬해 그만두었다. 시력이 좋지 않아 신체 검사에서 불합격했기 때문에 병역 의무나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위한 대체 복무도 하지 않았다.[3]

1967년 독일 학생 운동과 좌익 정치 운동 활동가가 되어 1968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그 후로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활동하였다. 프랑크푸르트의 좌익 서점에서 일하는 등 여러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했다. 이 기간 동안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테오도르 아도르노, 유르겐 하버마스 등 좌익 혁명 학생들이 주최한 강의를 포함한 대학 행사에 참석하기 시작했다.[4] 그는 카를 마르크스, 마오쩌둥,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등의 저작을 공부하여 무장단체 "혁명적 투쟁"의 단원이 되었다.

1971년 자동차 제조회사 오펠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공산주의 혁명의 전망 속에서 그의 동료들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6개월 후에 이런 정치적 활동을 이유로 해고당하고 만다. 그 후 그는 미숙련 노동을 이어가면서 활동을 계속했다. 1976년부터 1981년까지 택시 운전사로 일하였고, 후에 프랑크푸르트의 서점에서 근무하였다.

2. 2. 좌익 활동

Joschka Fischerde바덴뷔르템베르크주 게라브론에서 정육점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헝가리에 살던 독일계 주민으로,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6년 헝가리 정부에 의해 추방되어 미군 점령 지역으로 이주해왔다.[2] 본명은 요제프이지만, 요제프의 헝가리어 애칭 '''요슈카'''(Jóska|)를 독일식으로 표기한 이름을 통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소년 시절에는 교회에서 시종을 했다.[2] 1965년 17세에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사진작가 수업을 받았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 후 한동안 장난감 세일즈맨이 되었다.[3]

1967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학생 운동에 참여하며, 이른바 "68년 세대"의 일원으로 연방 공화국에 대한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좌익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시에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테오도르 아도르노, 유르겐 하버마스 등의 강의를 몰래 듣고 카를 마르크스, 마오쩌둥,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등의 저서를 탐독했다.[4]

1975년까지 좌익 과격파 단체 "혁명 투쟁"의 일원으로 경찰과의 충돌에 참여했으며, 화염병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2001년 언론에 공개된 사진에서 피셔가 경찰에 맞서 싸우는 모습이 확인되었지만, 그는 이 경력을 부정하지 않고 사과했다.[5] 이 시기 다니엘 콘-벤디트와 친구이자 룸메이트로 지냈다. 1969년에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회합을 위해 알제에 갔다.[6] 1971년 뤼셀스하임의 오펠 공장에 취직하여 내부 혁명 운동을 조직하려 했으나, 반년 만에 해고되었다.

1976년 3월 14일, 운동가 울리케 마인호프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 2명이 화염병으로 중상을 입은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었지만, 이틀 후 석방되었다.[5] 1977년 "독일의 가을"로 불리는 좌익 과격파 테러 사건(요인 납치·살해 및 하이재킹)이 빈발했지만, 피셔는 이 무렵 과격파 활동에 의문을 느껴 활동에서 물러났다.[7][8] 1981년 헤센 주 경제장관 피살 사건에서 범행에 사용된 무기가 1973년 미군 기지에서 도난당했고, 피셔 소유 차량으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피셔는 이 차를 지인에게 양도했으며, 나중에 무기 운반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설명했다.

피셔는 1976년 운전 면허를 취득하여 1981년까지 택시 운전사로 일했으며, 서점 점원이나 포르노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83년에는 배우로서 텔레비전 드라마에, 1986년에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모두 실제 경험이 있는 프랑크푸르트의 택시 운전사 역할이었다.

3. 녹색당 정치인

요슈카 피셔는 1981년 코른-벤디트 등과 함께 소정당을 창당했지만, 이듬해 녹색당에 합류했다. 헤센주 녹색당에서는 현실파와 생태주의 원리주의파 간의 대립이 있었으나, 피셔가 주도권을 잡았다.[2]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피셔는 녹색당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1989년 10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헤센 주 녹색당의 정기 간행물 〈슈티츠보트 그륀〉에 "재통일을 닥쳐라!"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1990년대 대부분 사회민주당여론 조사에서 부진하던 시기에, 피셔는 뛰어난 연설 능력과 카리스마로 "진정한" 야당 지도자로 불리며 지지를 받았다. 그는 녹색당을 독일 정치의 중도로 이동시키고, 연방 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4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헤센 주의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출마하여 당선된 피셔는, 1998년까지 녹색당의 대표인 "공동의장" 겸 당 대변인을 역임했다.[2] 1995년 보스니아 전쟁 대응과 시장주의 경제를 둘러싼 당내 대립에서, 피셔는 당을 보다 현실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2]

콜린 파월과 함께 있는 피셔

3. 1. 연방의회 의원 (1983-1985)

1983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녹색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연방의회 의원을 지냈다. 연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거침없고 대립적인 토론 방식으로 유명했는데, 1984년 10월 18일 당시 의회 부의장이었던 리하르트 슈튀클렌에게 "실례지만, 의장님, 당신은 멍청이입니다"(Mit Verlaub, Herr Präsident, Sie sind ein Arschloch.de)라고 말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녹색당은 의원직을 당원의 순번제로 운영했기 때문에, 피셔는 1985년에 의원직을 사임했다.[2]

요슈카 피셔 (1983년 2월 17일)

3. 2. 헤센 주 환경부 장관 (1985-1987, 1991-1994)

1985년 헤센주에서 사회민주당녹색당의 첫 번째 적녹 연정 정부가 구성되면서, 피셔는 환경 및 에너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선서식에 평범한 재킷과 운동화 차림으로 등장하여 선서를 하여 "운동화 장관"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이 운동화는 현재 오펜바흐의 독일 가죽 및 신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87년, 하나우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원자력 발전소 문제로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피셔를 포함한 녹색당 장관들은 경질되었다.

1991년 주의회 선거에서 다시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연립정부가 수립되자, 피셔는 다시 주 내각의 환경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피셔는 화석 산지로 유명한 메셀이 쓰레기 매립지로 사용되는 것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메셀 채석장은 1995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4. 외무장관 (1998-2005)

1998년 선거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사회민주당헬무트 콜기독교 민주연합을 꺾으면서,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연립 정부(적녹연정)가 구성되었다. 이후 몇 주간의 협상 끝에 10월 27일 새 정부가 출범했고, 피셔는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피셔와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2001년 2월 13일)


피셔는 코소보 전쟁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독일군을 파병하는 것에 찬성하였으나, 이라크 전쟁에는 반대하였다. 특히 2003년 제39회 뮌헨 안보회의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부 장관에게 "죄송하지만, 저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유명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2005년에는 우크라이나 비자 규정 완화로 인해 불법 이민자들이 위조 신분으로 독일에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16]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의회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피셔의 진술은 공영 방송에서 생중계되었다.

2005년 선거에서 연정이 패배한 후, 피셔는 10월 13일 외무장관직을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4. 1. 슈뢰더 내각의 외무장관

1998년 선거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끄는 사회민주당헬무트 콜기독교 민주연합을 꺾고, 사회민주당이 41%, 녹색당이 7%를 차지하면서, 합동 정부를 이룰 수 있었다. 승리한 슈뢰더 총리는 사회민주당의 다수를 압도하면서, 합동을 위한 선취권을 시작하였다.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사이의 협상이 이루어진 몇 주 후에 새 정부가 10월 27일에 정권을 잡았다. 피셔는 외무장관이 되었다. 2005년까지 그는 독일 전후 역사상 두 번째로 오랫동안 외무장관직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한스디트리히 겐셔 다음).

1999년 피셔는 코소보 전쟁에 독일의 참전을 후원하였다. 이 사건은 평화주의적 녹색당 안에서 과격적인 논쟁의 태도였다. 그는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을 집단 자살을 계획세우는 진술과 함께 이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1999년 5월, 한 반전 시위대가 코소보 전쟁에서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논의하는 당 대회에서 피셔에게 빨간 페인트가 담긴 가방을 던졌고, 피셔는 고막이 천공되는 부상을 입었다.[11]

피셔는 또한 아프가니스탄에 독일군을 주둔시키는 호의에 있었으나, 슈뢰더 총리가 이라크 전쟁에 가입하지 않는 것을 조언하였다. 피셔는 또한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부 장관과 함께 이라크의 대량 파괴 무기 소유에 증거의 부족함에 관한 유명한 회담을 하였다. 그는 코피 아난과 좋은 친구로 알려졌다.

2001년 독일 연방군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기로 한 슈뢰더의 결정에 대한 반전 비판론자들의 지지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피셔와 개발장관 하이데마리 비초렉-초일은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위한 1.15억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 패키지를 발표했다.[12] 2001년 말, 피셔는 유엔의 후원 하에 라인 강 상류에 있는 독일 정부 전용 숙소에서 10일간의 회의를 주최했고, 아프가니스탄 4개 파벌의 대표들이 본 협정에 서명하여 축출된 탈레반 정권을 대체할 과도 정부를 수립했다.[13]

2005년, 비평가들은 피셔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자 규정을 완화함으로써 불법 이민자들이 위조 신분으로 독일에 입국할 수 있게 했다고 비난했다.[16]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의회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다른 위원회 청문회와 달리 피셔의 진술(그리고 다른 고위 관리들의 진술)은 공영 방송에서 생중계되었다. 피셔의 위원회 출석은 12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2005년 독일 비자 사건 참조).

2005년 선거에서 합동 정부가 패한 후, 피셔는 평의원으로 은퇴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10월 13일 외무장관직을 사임하면서 정계 은퇴하였다.

4. 2. 코소보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1999년 피셔는 코소보 전쟁에 독일이 참전하는 것을 후원하였다. 이 사건은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녹색당 안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을 집단 학살하려 한다는 주장을 통해 이 전쟁을 정당화하였다.[10] 그러나 1999년 5월, 한 반전 시위대가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논의하는 당 대회에서 피셔에게 빨간 페인트가 담긴 가방을 던졌고, 피셔는 고막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11]

피셔는 독일군의 아프가니스탄 주둔에는 찬성했지만,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에게 이라크 전쟁에 참여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2001년 독일 연방군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기로 한 슈뢰더의 결정에 대한 반전 비판론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피셔와 개발장관 하이데마리 비초렉-초일은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위한 2억 5600만 마르크(1.15억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발표했다.[12] 2001년 말, 피셔는 유엔의 후원 하에 라인 강 상류에 있는 독일 정부 전용 숙소에서 10일간 회의를 주최했고, 아프가니스탄 4개 파벌의 대표들이 본 협정에 서명하여 축출된 탈레반 정권을 대체할 과도 정부를 수립했다.[13]

4. 3. 기타 외교 활동

1998년 9월, 16년 동안 집권했던 기독교민주연합과 기독교사회연합이 연방의회 선거에서 패배하자, 47석을 획득한 녹색당(Alliance 90/The Greens)과 제1당으로 약진한 사회민주당이 '적녹연정'을 구성하였다. 10월 27일,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총리가 되고, 피셔는 내각 2인자격인 부총리 겸 외무장관에 취임하였다.

1999년 코소보 전쟁 당시, 녹색당 내부에서 인도주의적 개입에 대한 찬반이 갈리는 가운데, 당시 순번에 따라 유럽 연합 이사회 의장이기도 했던 피셔는 NATO군의 코소보 공습을 지지하였다. 이 전쟁은 독일에게 있어 전후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지만, 피셔는 세르비아 당국의 행위를 나치 독일홀로코스트에 비유하며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10] 해외 파병과 이 비유의 시비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베를린 고등행정재판소는 이 비유를 금지하는 판결까지 내렸다. 실제로 피셔와 루돌프 샤르핑 국방장관의 주장과 달리, 코소보에는 강제 수용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해 5월 당 대회에서 피셔는 그를 전쟁 범죄자라고 부르는 반전주의자들에게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고, 그중 한 명에게 빨간 페인트(피 색깔)가 들어있는 컬러볼을 맞아 고막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11]

2001년 독일 연방군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기로 한 슈뢰더의 결정에 대한 반전 비판론자들의 지지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피셔와 개발장관 하이데마리 비초렉-초일은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위한 (1.15억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 패키지를 발표했다.[12] 2001년 말, 피셔는 유엔의 후원 하에 라인 강 상류에 있는 독일 정부 전용 숙소에서 10일간의 회의를 주최했고, 아프가니스탄 4개 파벌의 대표들이 본 협정에 서명하여 축출된 탈레반 정권을 대체할 과도 정부를 수립했다.[13] 당시 독일의 아프가니스탄과의 오랜 관계와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재건 지원을 약속한 국가들의 아프가니스탄 지원 그룹 의장직이 회의 개최지로 선정된 이유였다.[14]

2001년 9월, 피셔는 악바르 간지, 메흐랑기즈 카르, 에자톨라 사하비 등 여러 개혁주의 지식인들이 2000년 말 베를린에서 하인리히 벨 기념재단이 후원한 ['선거 후 이란' 컨퍼런스|2000년 학술 및 문화 컨퍼런스]]에 참가한 혐의로 4년에서 10년 사이의 징역형을 선고받자, 이란 주재 독일 대사 아흐마드 아지지를 긴급 회담을 위해 소환했다.[15]

국제형사재판소, 교토 의정서, 중동 위기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피셔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공개적으로 의견을 달리했다.[20]

1999년 피셔와 법무장관 헤르타 도이블러-겔멜린은 사형 선고를 받은 두 명의 독일 시민인 라그랑드 형제에 대한 사면을 호소했다. 독일 정부에 따르면 라그랑드 형제는 검찰이 1982년 그들의 체포 사실을 독일 영사관에 10년 후까지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청산가스 속에서 사형당했다.[21] 이에 대한 대응으로 유럽 연합은 유엔 인권위원회에 사형제도 반대 결의안을 제출했다.[22]

피셔는 독일군의 아프가니스탄 주둔에는 찬성했지만, 슈뢰더 총리에게 이라크 전쟁에 참여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피셔는 2003년 제39회 뮌헨 안보회의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에 대한 증거를 주장한 미국 국방장관 도널드 럼즈펠드와 유명한 대립을 벌였다("실례합니다만, 저는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피셔는 1969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회의에 참석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는데, 당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이스라엘에 대해 "끝날 때까지" 전면전을 촉구했다.[23]

피셔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집권 기간 동안 비판적이지는 않더라도 진심으로 친이스라엘적인 것으로 널리 여겨졌다.[24] 1999년 피셔는 유럽 집행위원 마누엘 마린과 유럽 연합의 중동 특사 미겔 앙헬 모라티노스를 포함한 대표단을 이끌고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등 평화 프로세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러 국가들도 방문했다.[25] 2001년까지 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과정에 대한 희망에서 중추적인 인물로 부상했는데, 부분적으로 2001년 6월 돌피나리움 나이트클럽 폭탄 테러 이후 폭력 사태가 진정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의 개입으로 미국 중앙정보국 국장인 조지 테닛이 주선한 휴전이 발표되었다. 피셔는 당시 폭발이 일어난 텔아비브에 있었다.[26] 피셔는 나중에 휴전 이행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 간의 회담을 주선했다.[27]

2002년 7월 피셔는 아라파트가 임시 총리를 임명할 것을 요구하는 제안을 제시했다. 제안에 따르면 투표 후 선출된 관리들은 2003년 말까지 잠정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고 2005년까지 최종 국경을 확정하는 민주적 개혁을 계속할 수 있었다.[28] 그는 2004년 11월 12일 카이로에서 열린 아라파트 장례식과 2005년 3월 야드 바셈에서 열린 새로운 홀로코스트 기념관 개관식에 독일 정부를 대표하여 참석했다.[29]

2000년 5월, 피셔는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과 의회가 실질적인 행정 및 입법 권한을 공유하는 유럽 연방의 창설을 제안했다. 피셔는 새로운 유럽 행정부와 의회로 이전될 권한과 국가 차원에 남아 있을 권한을 규정하는 헌법 조약의 최종 제정을 제안했다.[30] 이에 대해 프랑스의 시라크(Jacques Chirac) 대통령은 2000년 6월 독일이 정치적, 경제적 통합을 향해 다른 국가들보다 더 빠르게 나아갈 유럽 연합 국가들의 핵심 그룹을 주도하는 데 프랑스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31]

2002년 10월, 피셔는 글로츠(Peter Glotz)를 대신하여 독일 정부로부터 유럽의 미래에 관한 협약에 임명되었다. 피셔는 2002년 선거 이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의 연정 협상 중 협약에 참여하는 데 큰 관심을 표명했다.[32] 2002년 11월, 피셔와 프랑스 외무장관 빌레팽(Dominique de Villepin)이 공동 서명한 문서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헌법에 상호 방위 공약을 포함시키도록 압력을 가했다.[33] 2004년 그는 유럽 헌법 조약의 서명자 중 한 명이었다.

피셔는 오랫동안, 특히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를 비판해왔다.[34] 그러나 그가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는 주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에 의해 주도되었다. 2004년, 푸틴이 지지하는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ich)가 키예프에서 대규모 시위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선언한 후, 피셔는 우크라이나에 대통령 선거 재검표를 촉구했다.[35]

5. 정치 후의 생활

2005년 연방의회 선거 결과, 녹색당(Alliance 90/The Greens)이 집권 연정에서 탈락하자, 피셔는 세대교체를 이유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이 퇴진한 2005년 10월 18일에 부총리 겸 외무장관직에서 사퇴하였고(11월 22일까지 임시로 재직), 이듬해인 2006년 6월 녹색당 간부회의에 마지막으로 참석했다. 9월 1일에는 연방의원직에서 사퇴했다.

정계 은퇴 후 골드만삭스 등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2006년 9월에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국제경제 연구원 겸 객원교수직을 수락했다. 2007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경영 컨설팅 회사를 설립했다. 조지 소로스가 설립한 국제문제 유럽재단의 대표직에도 취임[59]했다. 소로스가 투자하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의 핵심 멤버이기도 하다. 또한 하이파 대학교와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피넬리 그룹에도 참여하고 있다.

5. 1. 학술 및 비영리 활동

2006년 9월부터 2007년까지 피셔는 프린스턴 대학교 우드로 윌슨 공공 및 국제 문제 대학원에서 방문교수를 지냈고, 리히텐슈타인 자결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으로 있었다.[36] 그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외교 및 국제 관계에 관해 강의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아랍 민주화 재단 이사회 창립 이사로 합류했다.[36]

피셔는 여러 비정부기구(NGO)에도 참여했다.

단체명직책비고
아랍 민주화 재단이사회 창립 이사2007년부터
외교관계협의회회원[36]
유럽외교관계위원회(ECFR)이사회 공동 창립 의장마르티 아티사리, 마벨 반 오랑예와 공동[37]
독일 유엔협회(DGVN)간부회원[38]
인간과학연구소(IWM)후원 이사회 회원[39]
롤란트 버거 인간 존엄성 상수상위원회 위원[40]



2010년 9월 15일, 피셔는 유럽 연합(EU)의 연방화 노력을 활성화하기 위해 설립된 스피넬리 그룹을 지지했다. 자크 들로르, 다니엘 콘-벤디트, 기 베르호프슈타트, 앤드류 듀프, 엘마르 브록 등이 이 그룹의 주요 지지자들이다.

5. 2. 경제 활동

2008년부터 피셔는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이끄는 워싱턴 D.C. 소재 컨설팅 회사인 알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Albright Stonebridge Group)의 수석 전략 자문을 맡았다.[41] 이 직책에서 그는 지멘스(Siemens), BMW, 독일 증권거래소(Deutsche Börse)에 자문을 제공했다.[42][43]

2009년 피셔는 독일 RWE사가 참여한 나부코 파이프라인(Nabucco pipeline) 프로젝트 자문을 맡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미 6자릿수 연봉의 컨설팅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한다.[44]

그 외 수익 사업 활동은 다음과 같다.

기업/기관직책기간
메리디암(Meridiam)감사위원회 위원2012년부터[45]
틸레이(Tilray)자문위원회 위원[46]


6. 개인사

피셔는 뷔르템베르크-바덴주 게라브론에서 정육점 주인의 세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여러 세대 동안 헝가리 부다케시에 살았으나, 소련이 헝가리를 점령한 후인 1946년에 헝가리를 떠나야 했다. 당시 헝가리계 독일인들은 당국으로부터 박해와 추방을 당했다.[2] 그의 별명 "요슈카"는 헝가리어 "요슈카"에서 유래했으며, 요셉(헝가리어 "요제프")의 애칭이다. 그는 가톨릭 신앙으로 자랐고, 어린 시절 외핑겐의 본당에서 시종으로 봉사했다.[2]

피셔는 1965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사진사 수습 과정을 시작했지만, 1966년에 그만두었다. 피셔는 학교 졸업장을 따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교나 대학에 다닌 적이 없다. 그는 시력이 좋지 않아 신체 검사에서 불합격했기 때문에 병역 의무나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위한 대체 복무도 하지 않았다.[3]

1996년까지 피셔는 쾌락주의자였으며, "뚱뚱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좋은 와인과 음식에 대한 그의 사랑에 대해 종종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외무부 장관으로 승진하면서 피셔는 체중 감량을 결심하고, 술을 끊고 채식주의자가 됨으로써 거의 하룻밤 사이에 몸매를 바꿨다. 2000년 그는 자신의 체중 감량 경험에 대한 책 ''나 자신을 향한 나의 긴 경주''를 집필했는데, 이 책은 독일에서 즉각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외무장관이 되기 반년 전인 1998년 함부르크 마라톤에 데뷔하여 3시간 41분의 기록을 세웠다.[51] 장관 재직 시절에는 1999년 뉴욕 마라톤(3시간 55분)[52]과 2000년 베를린 마라톤(3시간 55분)[53]을 완주했다. 그 후 훈련을 줄였고, 이라크 전쟁 직전 몇 달 동안 다시 체중이 늘기 시작했다.

피셔는 2005년 독일계-이란계 영화 제작자이자 각본가인 미누 바라티와 결혼했다. 그의 다섯 번째 결혼이었다. 이전 파트너이자 그의 아내였던 인게 포겔(1984년부터 1987년까지 결혼)과의 사이에서 1979년과 1983년에 각각 두 자녀를 낳았다. 2005년 바라티와의 결혼 당시 그녀는 이전 관계에서 낳은 여섯 살짜리 딸을 둔 어머니였고, 피셔의 자녀들은 당시 23세와 26세였다. 부부는 바라티의 딸과 함께 살고 있다.[54]

2004년 그는 독일 문장학자 디터 크리거에게 문장을 제작하도록 의뢰했으며, 이는 라인-마인 바펜롤레에 등록되었다.[55] 이 문장은 "의인 문장"의 한 유형으로, 은색과 붉은색으로 가로로 나뉘어 있으며, 상단에는 붉은색 칼날과 검은색 손잡이가 달린 십자형 도끼가, 하단에는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문장 상징은 붉은 독수리의 날개이며, 덮개는 붉은색과 은색으로 이중으로 되어 있다.[56][57]

그는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묘사하지만, 독실한 신자는 아니라고 한다.[58] 피셔는 다섯 번 결혼했으며, 가장 최근 결혼은 2005년 10월 28세 연하의 이란 망명자 2세 여성과의 결혼이다. 1980년대에 결혼했던 두 번째 부인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있으며, 2005년 4월 첫 손주가 태어났다. 그는 조깅과 축구를 좋아하는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2006년 이후, 피셔는 베를린(Berlin) 샤를로텐부르크-빌머스도르프 구(Charlottenburg-Wilmersdorf)의 고급 주택가인 베를린-그뤼네발트(Berlin-Grunewald)에 거주하고 있다.

7. 수상 내역

연도수상 내역
2002년하이파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2003년부베르-로젠츠바이크 메달 (파울 슈피겔 수여)
2004년고틀리프 두트바일러 상 (미셸린 칼미-레이와 장클로드 융커 수여)[47]
2006년텔아비브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2009년레오 바크 메달 (제임스 울펜슨과 헨리 키신저 수여)[48]
2012년미시간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49]
2016년통합 유럽에서 바이에른에 대한 특별 공로 훈장


참조

[1] 웹사이트 Weiterhin große Unzufriedenheit mit den Spitzenpolitikern http://tsarchive.wor[...] 2003-07-04
[2] 뉴스 Vor dem Altar gestählt fürs Leben http://www.sueddeuts[...]
[3] 뉴스 Zivildienst: Hat sich Joschka Fischer gedrückt? http://www.spiegel.d[...]
[4] 서적 Joschka Fischer and the Making of the Berlin Republic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5] 뉴스 Germany's Foreign Minister Is Pursued by His Early Firebrand Self https://query.nytime[...] 2001-01-15
[6] 뉴스 Has Greta Thunberg Betrayed the Climate Movement? https://www.spiegel.[...] 2023-11-17
[7] 뉴스 The Red and the Green https://www.nytimes.[...] 2005-11-27
[8] 뉴스 Who is Joschka Fischer? http://www.postwrite[...] 2002-02-14
[9] 뉴스 Kohl turns his fire on the Greens https://www.independ[...] 1998-08-03
[10] 뉴스 Europeans Impressed By Their Own Unity https://www.nytimes.[...] 1999-06-04
[11] 뉴스 German Greens’ Trittin Hit in Yoghurt Attack, Police Says https://www.bloomber[...] 2010-09-23
[12] 뉴스 Germany's Schroeder Presses Coalition To Back Him With Vote of Confidence https://www.wsj.com/[...] 2001-11-15
[13] 뉴스 Afghan Delegates At U.N. Talks In Germany Urge Tolerance https://www.orlandos[...] 2001-11-28
[14] 뉴스 Afghan Conference Switched to Bonn for Security Concerns http://www.voanews.c[...] 2001-11-22
[15] 뉴스 Germany's 'concern' at Iran verdicts http://news.bbc.co.u[...] 2001-01-14
[16] 뉴스 Germany's Fischer preps Kyiv students for future http://www.kyivpost.[...] 2010-04-21
[17] 뉴스 Cook funeral hears Blair's 'moral failure' criticised https://www.irishtim[...] 2005-08-12
[18] 뉴스 Fischers bedingter Abschied: 'Ich will die Freiheit zurück' http://www.spiegel.d[...] 2005-09-20
[19] 뉴스 Belgrado vive su mayor funeral desde Tito http://elpais.com/di[...] 2003-03-16
[20] 뉴스 The World; America the Invulnerable? The World Looks Again https://www.nytimes.[...] 2002-07-21
[21] 뉴스 U.S. Execution of German Stirs Anger https://www.nytimes.[...] 1999-03-05
[22] 뉴스 U.S. Execution of German Stirs Anger https://www.nytimes.[...] 1999-03-05
[23] 서적 Power and the Idealists Soft Skull Press 2005
[24] 뉴스 The World: The Jewish Question; Europe Knows Who's to Blame in the Middle East https://www.nytimes.[...] 2002-04-07
[25] 뉴스 EU strives to keep Middle East peace talks alive http://www.politico.[...] 1999-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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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뉴스 Bush's Mideast Consultations Proceed, Quietly https://www.nytimes.[...] 200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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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뉴스 German Urges Europe Create Central Body For Governing https://www.nytimes.[...] 2000-05-15
[31] 뉴스 French Leader, in Berlin, Urges A Fast Track to Unity in Europe https://www.nytimes.[...] 200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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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뉴스 Joschka Fischer v Gerhard Schrö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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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뉴스 Germany: Farewell to German Politics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0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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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뉴스 Joschka Fischer und die sieben Todsünden https://www.welt.de/[...]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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